그리움은 모두 북유럽에서 왔다 : 스웨덴,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 양정훈
한때는 이렇게도 생각을 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꼭 대단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평범한 내 삶을 용서하게 되는 거라고. 하지만 지나보니 세상에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저마다 삶이 저렇게 눈부시고 선명한 것을요. 그러니 나는 다시 찾아야 하는가 봅니다. 어떻게 어른이 되어 안녕히 안녕히 살 수 있을까요?
그러니 아무리 사람을 믿지 못해도 그의 가슴에 나무를 심을 수 없다고는 말하지 마라. 나무 하나 누구의 가슴에 심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허투루 사는 일이 없다. 부디 사랑이 다 지고 아무 것도 남은게 없다고 슬프지도 마라. 당신이 사막이 되지 않고 사는 것은 누군가 당신의 가슴에 심은 나무 때문이다.
그는 내게, 한 마디의 말이, 한 줄의 글이 자신을 다 채우도록 허락하는 사람은 빗질을 하면 빗질을 하는대로 곱게 잘 넘겨지는 반곱슬머리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너는 꼭 반곱슬머리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외로운 것은 사실 누가 곁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을 내가 가질 수 없기 때문 아니던가. 사람들은 누군가 곁에 있어도 외로울 것이었다. 갖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제 하나의 마음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기적인 사람의 특성이 있다. 그건 자기를 잃어버리고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 어쩌면 내가 아는 가장 이기적인 종류의 사람. 당신이 내 앞에서 울었다. 나는 그걸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나도 울고 싶던 때가 적어도 열 번은 되었을까? 하지만 나를 잃어버리는 것도, 그걸 보이는 것도, 또 나를 잃어버린 것을 당신이 다 아는 것도 두려웠다. 만약 당신 앞에서 울 수 있었으면, 그랬으면 나는 조금 비었을텐데. 누가 또 자신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울지 못하고 우는가. 나는 커피잔을 꼭 쥐었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고 있을지 모른다고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 사람들은 초라해진다. 가슴을 뛰게 했던 길이, 그런 사람이. 그래서 모르는 사이 온 마음을 다해 믿어버린 어떤 여정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순간 무너져 내린다.
누군가 그러더라, 사람도 모두 섬이라고. 차라리 당신이 섬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어느 바다에 살고 있는지 알 수라도 있으면 다리라도 놓아 닿을 텐데. 검은 물 다 건너 당신 그 섬에 작고 오붓한 집이라도 지을 텐데. 당신은 외딴 섬도 되지 못하고 나는 어디에도 닿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위안이 되고 싶어도 함부로 당신의 방황을 말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 당신이 당신의 최선을 다해 그 방황을 겪어내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당신은 초라하지 않다.
모든 게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 모든 게 보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꼭 사랑이 되어야 전부인 것도 아니다. 가끔은 이렇게 아주 조그마한 이 마음 그대로 너무 충분해서 당신을 내가 꼭 갖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걸. 때로는 우리가 꼭 사랑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나는 제일 깊은 서랍에 당신을 꼬옥 접어서 넣어둘 거란다. 그거면 된다.
슬프다, 기쁘다, 행복하다, 아쉽다, 피곤하다, 어쩌다 저쩌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실제로 마음이 갖는 수만 가지 감정들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다. 아직 마음을 표현하는 말들이 반의 반도 발견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나는 슬픔과 아쉬움 사이의 어디에 있는 것도 같고, 다시 보이 그리움을 한참 지나 조금 전에 아득함도 지나친 어디에 있는 것도 같다. 노랑, 회색, 파랑만 세상에 있는 줄 알았는데 살다 보니 어느 날 문득 크림베이지 색이나 아이리스블루 같은 색이 나타나고, 그러면 아, 그게 이런 색이구나, 하고 아는 것처럼. 언젠가 누군가 마음을 말하는 다른 말을 더 찾아내면 그때야 나는 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일단, 텅 비고 가득 찬 것 같다고 해두자. 당신이 보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보고 싶어 했으니 이젠 나 할 만큼을 다 한 것 같다고 하자. 당신이 없다는 사실이 다시 까마득했지만 그 역시도 하루 종일 서럽고 노여운 마음을 데리고 진을 다하도록 걷다 보니 이제는 별로 까마득 할 것도 없다고 하자. 내가 써야 하는 열 가지, 스무 가지 되는 마음을 다 써버려서 지금은 아무 마음도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해두자. 뜨겁던 것도 차갑던 것도 다 없고, 이루어질 수 없는 걸 아주 오래 기다리는 것도 다 했고, 정말로 이제 미운 사람도, 그리운 사람도 없다고 하자. 그러니 딱 하나 남는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 하나만 작은 알맹이처럼 남아서 침대에 앉아 가만히 졸고 있는 것. 아무 마음도 갖지 않은 나만 남았다. 혹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찾아낸 어떤 색으로도 말해지지 않는 마음만 남았다. 다른 마음은 다 쓰고 나면 지고 멈추는데, 슬픔이나 바람도 흩뜨릴 수 없는 마음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말로는 아직 찾지 못한 마음. 아침부터 불던 모든 바람이 저마다 밤까지 다 불고, 마지막 바람이 지나고 난 자리에 무언가 남아 멀뚱멀뚱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끝까지 남은 것. 어쩌면 그게 진짜 내 마음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