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nding postcards from california

📚 b o o k s

열다섯 번의 낮 | 신유진

hannahsienne 2022. 12. 21. 15:01

 

 

열다섯 번의 낮
- 신유진




p13 나는 결국 솔직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어느 귀퉁이, 수려하지 않은 문장 하나에 투박하고 멋없는 진심 하나를 숨겨 놓을 테다.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혼자 하면서 언제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아니, 들키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행여나 누군가 진짜 나를 찾아줄까 가만히 머리카락을 세울 것이다.

 

 

p42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장국영이 왜 죽었는지, 왕가위의 영화가 왜 예전 같지 않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몇 번이고 나누었던, 새로울 것 없는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척 연기하며 다 알고 있는 내용에 고개를 끄덕였고 공감하지 않은 부분에는 입을 다물었다. 겉도는 대화를 모른 척하던 그날의 우리를 생각하면 애처롭다. 마지막까지 저물어 가는 관계를 위해 애를 썼던 것이 아닐까.

 

 

 

p76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반쯤 열린 창으로 맞이하는 바람의 세기와 차체의 덜컹거림, 사방으로 튀는 자갈의 소리가 좋았다.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불편함이었다. 보잘것없는 속도와 그에 걸맞은 장애물, 거기에 따른 자잘한 충격, 그런 것들은 커다란 희열 혹은 극심한 고통과는 거리가 먼 삶이고 나는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모험조차도 일정한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주제에 바다라니. 그 속에 수억 개의 생명들이 어떻게 일렁이고 있을 줄 알고.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나의 바다를 향한 욕망은 그렇게 얕고 추상적이었다. 성난 파도를, 그것을 견뎌 내는 생명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p111 그리하여 지금 내 방, 휑한 책상 앞에 앉았다. 등이 굽은, 쭈그린 이 자세는 익숙하다. 나는 어쩌면 한동안 이렇게 몸을 숙인 채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직 넘어지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인가? 거기 넘어 다음, 그곳이 보이지 않는다. 사방이 이렇게 탁 트였는데 나는 제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p123 무더위가 꺾이면 생각해 보련다. 모든 일은 지나고 난 후 조금 더 분명하게 보이는 법이니까. 

 

 

p130-131 가을비에 파리의 찬란했던 모든 색들이 씻겨 내려져 가고 있다. 이곳에서 이십 대를 보냈고,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졌다. 까닭 없이 좋아했고 미워했으며, 술에 취했고, 웃고, 울고, 뜨겁게 달아올랐으나 천천히 식어 버렸다. 그렇게 무언가 지나가 버렸다. 이제 가면 다시 오지 않을 그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p148 냉장고 말고 또 우리가 버린 것들을 생각해 본다. 많은 것들이 있다가 사라졌고,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떠나갔다. 그 모든 게 뭘 잘 몰랐던 우리의 탓인 것만 같아 때때로 마음이 무겁다. 지나고 나면 그렇다.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다. 

 

 

p168 그와 내가 같은 부류인 것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유 없는 오만이라고 손가락질당할 일이란 것을 알면서 이제 와 고백하는 것은, 그에게 보냈던 비인간적인 감정이 얼마나 나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었는지 말하고 싶어서다. 나는 토마가 싫었고, 이유 없이 그를 싫어하는 나 자신이 더 싫었다.

 

 

p191 "나 지금 괜찮나요?" 그 여자의 확신 없는 물음에 우리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나는 몽마르트 한복판에 서 있을 여자를 상상했다. 사크레쾨르에 놓인 들꽃 한 다발 같지 않을까? 아무도 주워 가는 이 없이 싸늘한 바람에 쓸려 세상 한 바퀴를 돌고 돌아와, 그곳에 내가 갔다 왔었노라고 평생 추억하며 살지도 모르겠다.

 

 

p219 안 괜찮은 건 무엇인가? 여름이 이렇게 가 버렸다고 한들, 몇 번을 보냈고 몇 번을 이겨낸 여름인데. 그러니까 나는 모든 게 괜찮아졌다고 생각한다. 큰 변화는 없었다. 모두 아주 작은 것들에 불과하다. 행복을 구걸하지 않고 불행을 내뱉지 않는 법을 배워갈 뿐이다. 나를 흔드는 것에 조금은 덜 동요하며 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