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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hannahsienne 2022. 12. 22. 04:55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p28 이상한 밤이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한 밤이었다. 서로의 본심을 묻지도... 정리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쏟아진 첫눈 역시 어딘가 모르게 서툰 느낌이었고, 때의 느낌에 비해 돌아가는 길은 터무니없이 짧은 것이었다. 눈길을 걸으며, 그러나 스스로는 많은 것을 고백했다 믿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전달한 기분이었다. 설령 그것이 오해라 할지라도, 오해를 믿지 않고선 살아갈 없는 것이 인간이다.

 

 

p156 인간은 대부분 자기와, 자신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p164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이 맛이 가는 거라구.

 

 

p185 아니,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롤르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p186 자신의 삶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미인도 불 꺼진 전구와 같은 거지. 불을 밝힌 평범한 여자보다도 추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는 거야.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하나의 전구를 터질 듯 밝히면 세상이 밝아진다고 생각하지. 실은 골고루 무수한 전구를 밝혀야먄 세상이 밝아진다는 걸 몰라.

 

 

p192 무엇을 해줄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보잘것 없는 기억의 편린조차도 더없이 눈부신 순은의 반짝임으로 떠오른다. 인생에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왜 그토록 짧기만 한 것인가. 왜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왜 인간은, 자신이 기르는 개나 고양이만큼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인간은 지금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망각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p196 누구나 그럴 듯한 학교를 나오고, 그럴 듯한 직장을 얻고, 그럴 듯한 차를 굴리고, 그럴 듯한 여자를 얻고, 그럴 듯한 집에서 사는... 그럴 듯한 인간이 되고 싶은 시절이었다. 그럴 듯한 인간은 많아도 그런, 인간이 드문 이유도... 그럴 듯한 여자는 많지만 그런, 그녀가 드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럴 듯한 것은 결코 그런, 것이 될 수 없지만 열아홉 살의 나는 미처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p200 누구나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았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

 

 

p213 영원한 장소도 영원한 인간도 없겠지만, 영원한 기억은 있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217 우리는 다 함께 요한을 의지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의 후회를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그때>의 인간처럼 무능한 인간은 없다.

 

 

p220-221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야. [...] 안 그래도 불안해 죽겠는데 더더욱 불안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지. 보잘것없는 인간들의 세계는 그런 거야.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없는 거라구. 그래서 와와 하는거야. 조금만 이뻐도 와와, 조금만 돈이 있다 싶어도 와와, 하는 거지. 역시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데 말이야. 보잘것없는 인간들에겐 그래서 <자구책>이 없어. 결국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면서 결국 그렇게 평생을 사는 거야. 평생을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말이야. 이 세계의 비극은 그거야. 그렇게 서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 보잘것없는 인간들은 보잘것없는 인간들과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지.

 

 

p224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꿈같은 일이란 실은 별다른 일이 아니야.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꿈같은 사랑이란 것도 별다른 게 아니지. 그냥 살아가듯이 그냥 사랑하는 거야. 기적 같은 사랑이란 그런 거라구. 보잘것없는 인간이 보잘것없는 인간과 더불어... 누구에게 보이지도, 보여줄 일도 없는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p228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p236 깜박이며 불을 밝히고 있던 <희망>이 생각난다. 그, 희망을 흔들며 지나가던 바람처럼 실은 그런 식으로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인간은 머물 수 없음을, 하여 인생은 흐르는 강과 같다는 사실을 무렵의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오고, 나는 막연히 우리의 청춘도 딸기밭과 같은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생각했었다.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요? 난 딸기밭에 가는 중이에요. 실감 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머뭇거릴 일도 없죠. 딸기밭이여, 영원하리.

 

 

p252-253 누구나 마찬가지인 인간에게, 누구도 마찬가지일 수 없는 삶이 주어진 이유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p293 가야할 곳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봄날이었다. 아무 일 없는 세상을, 나는 음악을 들으며 아무 일 없이 쏘다녔었다.

 

 

p295 요한의 말처럼 인간은 이상한 것이었고,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각자 자신의 어둠을 안고 사는 존재들이었다. 인간은 이상한 것이다. 인생은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더없이 이상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p255 환한 오전이었는데 불 꺼진 밤의, 회전목마에 홀로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잠이 오지도 않았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힘없이 세수를 하고 나는 집을 나섰다. 커다란 한 마리의 목마를 타고, 아니 그 목마를 무거이 끌며 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의 골목길은 어찌 그리 눈부신 것이었던가.

 

 

P295 뚝. 그 전까지 세계와 나를 연결해 온 긴장감 같은 것이, 그때마다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묘한 기분이었고, 더없이 외로운 느낌이었다. 줄다리기를 하다 갑자기 상대가 줄을 놓았을 때처럼, 나는 이제 무엇을 붙잡고 잡아당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p310 왜 몰랐을까,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이 순간 세상의 평균은 올라간다. 누군가를 뒤쫓는 순간에도 세상의 평균은 그만큼 올라간다 나는 생각했었다. 누군가 누군가의 외모를 폄하하는 순간, 그 자신도 더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

 

 

p310-311 사는 게 별건가 하는 순간 삶은 사라지는 것이고, 다들 이렇게 살잖아 하는 순간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할 세상이 펼쳐진다.

 

 

p350 지금 내 삶은 이런 것이다. 이것도 삶이란 사실을, 이것이 삶이란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의 삶은 극히 드물다. 인간은 결국 자신이 나비인지 나방인지를 알 수 없는 애벌레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