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 요시모토 바나나
p42 나는 지금, 그를 알게 되었다. 한 달 가까이나 같은 곳에 살았는데, 지금 처음으로 그를 알았다. 혹 언젠가 그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하게 되면 항상 전력으로 질주하는 나지만, 구름진 하늘 틈 사이로 보이는 별들처럼, 지금 같은 대화를 나눌 때 마다, 조금씩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p57 아무튼 나는 말로 표현하자면 사라져버리는 담담한 감동을 가슴에 간직한다. 시간은 많다. 끊없이 되풀이되는 밤과 아침,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런 때가 꿈이 될지도 모르니까.
p66 걷는 걸음걸음, 살아가야 하는 나날들을 내던지고 싶었다. 내일이 오고, 모레가 오고 그러다 보면 내주가 오고, 틀림없이 그렇다. 그런 일들이 이토록 성가셨던 적이 없다. 이제나저제나 나는 슬픔과 암울함 속에서 살아가겠지, 정말 싫었다. 가슴속은 태풍인데, 담담하게 밤길을 걷는 자신의 영상이 귀찮았다.
p80 그녀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제멋대로 배우는 것은 좋지만 그 행복의 영역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세뇌 되어 있다. 아마 그들의 자상한 부모들로부터. 그리고 진정한 기쁨이 뭔지를 모른다. 어느 쪽이 좋은지, 인간은 선택할 수 없다. 각자는 각자의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져 있다. 자신이 실은 혼자라는 사실을 가능한 한 느끼지 않을 수 있어야 행복한 인생이다.
p110 "세계는 딱히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일에는 대범하게, 되는 대로 명랑하게 지내는 편이 좋다고."
p124 사람이란, 상황이나 외부의 힘에 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내면 때문에 지는 것이다.
p134 나는 안다. 즐거웠던 시간의 빛나는 결정이, 기억 속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지금 우리를 떠밀었다. 싱그럽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향기로웠던 그날의 공기가 내 마음에 되살아나 숨쉰다.
p130 사람들은 모두, 여러 가지 길이 있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택하는 순간을 꿈꾼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지금 알았다. 말로서 분명하게 알았다. 길은 항상 정해져 있다. 그러나 결코 운명론적인 의미는 아니다. 나날의 호흡이, 눈길이,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자연히 정하는 것이다.
p173 혹 그녀가 거짓말쟁이고 가슴 설레며 달려간 내가 어리석었다 해도 상관없다. 그녀는 내 마음에 무지개를 보여주었다. 뜻밖의 일을 기대하는 설레임이 되살아나, 내 마음에 바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p182 또다시 찾아올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고독한 밤은 나를 진저리치게 한다. 인생이 그 반복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런데도, 돌연 편히 숨쉴 수 있는 순간이 분명 있어 나를 설레게 한다. 때로, 설레게 한다.
p194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오랜 시간, 강바닥을 헤매는 고통보다는, 손에 쥔 한줌 사금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