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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hannahsienne 2023. 1. 1. 05:18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책방 소리소문

 

조금 안다고 뭐 그리 대수겠는가. 많이 아는 체하는 날들은 고개 숙이지 못하게 한다. 고개를 숙이지 못하면 남보다 먼지를 더 들이마시게 되고 그 먼지는 씻겨나가지 못하고 몸 안에서 굳어지고 딱딱해져서 생각과 함께 돌이 된다.

 

 

" 있겠죠?" 어떻게 없을까. 그림을 이야기하고 기르던 고양이를 이야기하다가 저녁이 오는 것까지 같이 바라봐야 한다면 어떻게 멀리 있을 있을까. 사라지는 것을 보는 일과 사라지는 것을 애써 잡는 , 일을 혼자는 없을 터인데 어떻게 우리가 따로일 있을까. 

 

 

말 한마디가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 귀에는 아무 말도 아니게 들릴 수 있을텐데 뱅그르 뱅그르 내 마음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말. 한마디 말일 뿐인데 진동이 센 말. 그 말이 나를 뚫고 지나가 내 뒤편의 나무에 가서 꽂힐 것 같은 말이. 그날 밤은 나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말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말, 모두다 빗물에 씻겨도 씻겨 떠내려가지 않을 당신, 그 무렵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를 당신에게 말하지 못했다. 

 

 

문득 행복하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기울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어떤지 궁금할 . 많이 사랑했느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만큼을 살았는지, 어땠는지 궁금할 .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 터져버릴 같은 시간보다 누구를 사랑해서 터져버릴 같은 시간이 낫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누가 마음을 몰라주는 답답함 때문이 아니라 누가 마음을 알기 때문에 외롭고, 목이 마른 이유들을 아느냐고 묻고 싶다. 묻고 싶은게 많아서 당신이겠다. 나를 지나간 내가 지나간 세상 모든 것들에게 ' 지내냐' 묻고 싶어서 당신을 만난 거겠다.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이 무슨 색인지 알고 싶다는 말이며 그 색깔을 나에게 조금이나마 나눠달라는 말이다. 그 색에 섞이겠다는 말이다.

 

 

 

 

순간일 수도 있지만 영원일 수도 있는 것이고, 영원도 어느 한순간 토막이 나기도 하려니 그렇게 지금 당장 마음 가는대로만 마음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닌가. 말이 안 통하는 거야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과도 마찬가지. 사랑이 삐그덕 대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사랑하는 연인들이 낼 수 있는 불의 밝기를 사랑이라는 집에 잘 사용하는 것, 그것만이 사랑이다.

 

 

우리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다. 적어도 사람에 관해서는 더 그렇다. 한 사람을 두고 상상만으로 그 사람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아무리 예상 해봐도 그 사람의 첫 장을 넘기지 않는다면 비밀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하루 한 번 내 자신이 귀하다고 느겨라. 좋은 것을 바라지 말고 원하는 것을 바라라. 옆에 없는 것처럼 그 한 사람을 크게 사랑하라.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찾는 동안, 네가 그 틈에 끼어 네 감정을 케이크 조각만큼 나눠주는 동안, 그 피곤 때문에라도 네 자신이 실망스러웠노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넌 어떤 달리기에서 진 사람 같았다. 그러나 괜찮다. 너는 무려 육 개월 동안이나 계속되는 빨간 날들을 만들기로 했으니까. 너는 잠시 동안의 최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조금 울고 조금 웃다가 오래달리기를 마친 얼굴을 하고 그리운 것들을 찾아 되돌아올테니까. 세상의 모든 등대를 돌아보고 왔다고 한들, 서커스단에 섞여 유랑하느라 몸이 많이 축났다고 한들 뜨겁게 그리운 것들이 성큼 너를 안아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들은 너를 질투할 것이 분명하니까. 누군가가 네가 없는 너의 빈집에 들러 모든 짐짝들을 다 들어냈다고 해도 너는 네가 가져온 새로운 것들을 채우면 될 터이니 큰일이 아닐 것이다. 흙도 비가 내린 후에 더 굳어져 인자한 땅이 되듯 너의 빈집도 네가 없는 사이 더 견고해져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 형편없는 상태의 네 빈집과 잔뜩 헝클어진 채로 돌아온 네가 서로 껴안는 것, 그게 여행이니까. 그렇게 네가 돌아온 후에 우리 만나자. 슬리퍼를 끌고 집 바깥으로 나와 본 어느 휴일, 동네 어느 구멍가게 파라솔 밑이나 골목 귀퉁이쯤에서 마주쳐 그동안 어땠었노라고 얘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