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은 행복하다 : Scandavia, The Happiest Land
- 양정훈
틀림없이 더 나은 삶이 있으리라는 의심이었다. 다만 아직 그걸 찾지 못했다는 자책이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는 불안이기도 했다.
우리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게 사람이다. 문제는 무엇을 통해 또 누구에게 우리가 인정받느냐, 더 나아가 정말 인정받아야만 하는가에 있다. 그리고 스웨덴은 말한다. '누군가를 이겼고 몇 등을 했는가?' 적어도 이것이 그의 성취를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를 판단하는 기분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무엇이 크고 원대한 꿈이고, 무엇이 작아서 초라한 꿈인가. 최고의 기업 CEO가 되겠다는 꿈과 제 가족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한 농사꾼이 되겠다는 꿈 사이에 대체 무엇이 큰 꿈이고 무엇이 작은 꿈인가. 누가 함부로 꿈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가.
세상적 성공과 능률만 계산하는 인간으로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고, 겨우 한 번 사는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꿈꾸는 자만이 자아를 온전히 갖는다. 자신을 소유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시를 읽는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마종기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속도는 언제나 불안정을 동반한다.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쉼표를 발견했을 때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그 문장부호의 뜻을 미처 읽지 못하고 되레 속도를 높였다. [...] 그러나 나는 멈추는 것, 질문의 본질을 따지는 것, 다른 해답을 고민하는 것, 이 모든 걸 음미하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진작 배웠어야 했던 속도 연습을 북유럽에서 이제야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속도를 늦추고, 때로 기꺼기 멈춰서는 즐거움이었다.
하루는 멀리 산책을 갔다가 돌아와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는데 창밖의 자작나무 숲에 거친 바람이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문득, 책을 읽을 때면 일부러 빗소리를 틀어둔다는 한 친구가 생각났다. 밤새도록 오래오래 사람을 만지는 소리. 이런 것들은 바쁜 생활 속에서는 잘 들리지 않다가 우리가 삶의 속도를 잠시 멈춘 때에야 그제야 발견되는 소리다.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한 행동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질문하지 않는다면, 혹은 질문이 바르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필요한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또 우리가 삶에 관해 어떤 의심이나 질문을 하고 있는가, 그것을 할 수 있는가는 곧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질문의 수준이 삶의 수준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꿈을 보고 배운다. 꿈은 그러니까 공동체적이고 유기적인 것. 행복에 관한 꿈도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꿈을 함께 꿔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