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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포인트의 연인 | 요시모토 바나나

hannahsienne 2023. 1. 2. 05:12

 

 

사우스포인트의 연인
- 요시모토 바나나

 

 

 

Paris, France

 

p13-14 천천히 시간을 두고 포기하는 것은, 간혹 모든 것이 옛날로 돌아갈 듯하고 앞으로 만사가 좋아질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희망의 순간이 있는 만큼, 포기해 버리는 것보다 배는 슬픈 일이었다. 기대하면 하는 만큼, 슬픔도 깊어진다. 만날 때마다 하나, 또 하나 품고 있던 희망을 지워 가는 그 느낌은 얼룩처럼 마음에 남아 있었다. 더구나 무의식적으로 전기 스위치를 끄는 것이 아니라, 촛불을 하나 하나 불어 끄는 것처럼, 보다 의식적으로 지워 나가는 느낌이었다.

 

 

p38 만사가 대개 그렇지만, 무언가가 시작되는 순간은 딱 하나의 포인트로 집약된다.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진솔하게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그 한순간에 닿는다.

 

 

p39 집 밖에 있을 때면 나는 늘 숨죽이고 웅크리곤 했다. 주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데, 어떻게든 맞추려고 애썼던 것이리라. 그 피로감이 쌓여 있었다. 혼자이고 싶었다.

 

 

p51-52 텔레비전 드라마나 잡지, 만화의 세계는 대개 거짓이다. 세계는 연애로만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다. 훨씬 더 세밀한 꿈같은 것이고, 한 오라기 실은 반드시 천 전체로 이어진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때 이어짐에 관한 그런 사고가 싹터, 훗날 내가 퀼트 제작에 매료된 것이리라.

 

 

p53 사람이란 인생의 출발점에 이미 행복의 대부분을 아는 법이야.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행복의 틀은 그때 만들어지거든. 그리고 그 다음은 줄곧 그것을 되찾기 위한 투쟁의 연속일 뿐.

 

 

p66 그때는 모든 것을 망치는 원인이 내 안에 숨어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스스로 강해지면 아무리 힘든 일도 시간과 함께 지나간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못 했다.

 

 

p75 그리운 마음이 너무 크면 만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죠. 남자에게 첫사랑의 연인과 어머니가 얼마나 무거운 존재인지, 여자는 절대 모를 겁니다. 말할 수가 없어요.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있으면,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건 말이죠, 아무리 낙천적인 형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분명 그랬을 거예요.

 

 

 

이런 일은 이제 더는 싫어, 산 나무를 가르듯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엇과 갈라지기 싫어. 있었을지도 모를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싫고. 투덜거리거나 어리광을 피우는 것조차 허망했다.

 

 

 

p84 하지만 그런 것들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에 매달려야 하는 걸까. 아무것에도 매달리지 않는 세계가 있다면 그곳은 얼마나 혹독한 세계일까. 예를 들어, 우리 엄마는 금방 도망친다. 힘든 일이 생기면 즐거운 일로 기분을 돌려 슬쩍 비켜간다. 정말 중요한 일은 알아보지만, 나머지는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 한다. 주위 것들에 매달려 간신히 인생이란 바다를 향해하고 있다. 반면 혼자서 깊고 어두운 것과 지그시 마주한다면 얼마나 힘겨울까.

 

 

p211 그럴 수 밖에. 내게는 우쿨렐레가 있고 가족이 있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테트라 너만 쫓아 일본에 간다는 건 나를 죽이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느니 여기 있으면 온갖 빛 속에, 파도 속에, 빗속에, 무지개 속에 언제든 네가 있으니까, 그편이 좋다고 생각했어.

 

 

p217 나는 그날, 사우스포인트에서 분명하게 그것을 보았다. 바다와 하늘, 하늘과 이 세상, 바람과 파도, 온갖 것들이 아름답게 뒤섞이고 녹아드는 그 지점에서, 나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마련해 놓은 또 다른 틈새를 보았다. 두세계의 거대한 힘이 섞이는 것을. 이 세상에는 다른 세상을 엿보게 해 주는 무수한 틈새가 있고, 거기에 감응하는 혼이 있는 한, 아직은 이렇게 많은 것을 그냥 보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필시 이 장소는 간혹 인간이 그런 신비로운 힘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정말 흔치 않는, 혹독하면서도 친절한 곳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