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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 김진영

hannahsienne 2023. 2. 4. 01:27

 

 

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 김진영

 

p12 마음이 무겁고 흔들릴 시간이 없다. 남겨진 사랑들이 너무 많이 쌓여 있다. 그걸 다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p16 눈앞에서 문이 닫히고 모든 시끄러운 일상들이 문 뒤로 물러났다. 눈앞에 오로지 사랑의 대상들만이 남았다. 세상이 사랑의 대상들과 소란하고 무의미한 소음들의 대상들로 나뉘어 있다는 걸 알았다.

 

 

p21 어떻게 모든 것들을 지킬 수 있을까. 나를 지킬 수 있을까.

 

 

p39 살아오면서 정갈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안에 허위의식도 많았겠지만 스스로를 잘 지키려는 자긍심 또한 진실이었다. 자기를 긍정하는 것보다 힘센 것은 없다. 그것이 내게는 자긍이고 정갈함이었다. 그건 지금도 지켜내야 하는 나의 정신이고 진실이다.

 

 

p50 마음이 너무 무거운 건 이미 지나가서 무게도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너무 가벼운 것 또한 아직 오지 않아서 무게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 모두가 마음이 제 무게를 잃어서였다. 제 무게를 찾으면 마음은 관대해지고 관대하면 당당해진다. 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도록 놓아주고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을 있는 모양대로 받아들이고 다가오는 것들도 무심하고 담담하게 맞이한다. 

 

 

p51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p61 나는 때로 그것이 자랑스럽고 또 회의에 젖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사랑이어서 나는 그것들을 사랑했고 또 여전히 사랑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른 사랑에도 눈을 뜨는 것 같다.

 

 

p65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사실만은 확실하다. 모든 것은 마침내 지나간다는 것: "이 놀라운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분명한 건 그 행복의 근원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 아니 지금 여기의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p77 TV를 본다. 모두들 모든 것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p85 헨델의 <사라반드>를 듣는다. "마음껏 울게 하소서"라고 헨델은 노래한다. 헨델의 역설법. 마음껏 운다는 건 마음껏 사랑한다는 것이다. 생 안에는 모든 것들이 충만하다. 눈물도 가득하고 사랑도 가득하다. 왜 생 안에 가득한 축복과 자유들을 다 쓰지 못했던가.

 

 

p92 비 오는 날 세상은 깊은 사색에 젖는다. 그럴 때 나는 세상이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는지도 안다.

 

 

p97 아침 산책. 또 꽃들을 들여다본다. 꽃들이 시들 때를 근심한다면 이토록 철없이 만개할 수 있을까.

 

 

p99 한동안 눈뜨면 하루가 아득했다. 텅 빈 시간의 안개가 눈앞을 가리고 그 안개의 하루를 건너갈 일이 막막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에 눈떠서 문득 중얼거린다.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

 

 

p115 많은 것이 달라졌다. 또 많은 것이 그대로다. 어디에 발을 딛고 설 것인가. 답은 자명하건만 그 자명함 앞에서 매일을 서성인다. 서성임, 그건 자기연민일 뿐이다.

 

 

p119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p121 모든 일을 이미 결정된 것으로 규정하고 받아들이는 습관.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한 탓에 나는, 삶의 다반사들이 일어나고 진행되면서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인 예외와 우연의 사건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삶 속에 그렇게 미리 결정되고 예정적인 것은 없다. 길은 언제나 곡선이다. 길을 가다 보면 다른 길이 기다리고 또 만들어진다. 그것이 생 스스로 가는 길이다. 생은 과정이지 미리 결정된 시스템이 아니다. 결정주의라는 선취된 오류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오류의 자리에 희망을 앉혀야 한다. 희망은 어디에나 있고 발생한다.

 

 

p125 때와 시간은 네가 알 바 아니다. 무엇이 기다리는지, 무엇이 다가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은 열려 있다. 그 열림 앞에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일이다. 

 

 

p143 나는 사랑의 주체다. 그러나 나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건 아닐까. 사랑을 줄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건 아닐까.

 

 

p147 나처럼 많은 사랑을 받아온 사람이 있을가. 그러나 받기만 하고 나는 그 사랑들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색한 부자의 곳간처럼 내 안에 쌓여서 갇혀 있는 사랑들. 이 곳간의 자물쇠를 깨고 여는 길- 거기에서 내 사랑은 시작된다.

 

 

p159 조용한 날들을 지키기.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p218 나의 불행들은 늘 너무 지독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 또한 늘 나를 찾고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 특별히 새로운 자세가 따로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내 본래의 자세에게로 다시 돌아가면 될 뿐.

 

 

p223 사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건 내부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외부로의 표현이다. 사랑의 마음, 그건 사랑의 행동과 동의어다.

 

 

p231 다시 프루스트: "우리가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그때 우리를 구출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그 문을 우리는 우연히 두드리게 되고 그러면 마침내 문이 열리는 것이다."

 

 

p268 그래, 나는 사랑의 주체다.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 것. 그걸 늘 가슴에 꼭 간직할 것.